Friday, November 11, 2011

가벼운 이야기: 천일의 약속

요즘 한국에선 김수현씨가 쓴 한 멜로드라마가 인기다. 그녀의 드라마를 이전에도 가끔 보곤 했는데, 이 드라마는 지난 주 화요일에 보고 재미있어서 이번 주는 본방 사수를 했다. 특히 5회가 재미 있었다. 여자 주인공이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 남자주인공이 결혼을 하루 앞두고 파혼을 선언한 것을 알게 되자 당신의 삶까지 삼켜버릴 수는 없다라고 진심을 다해 마음을 전하는 장면이 심금을 울렸다. 그녀로서는 최선의 배려라 생각했기 때문이라. 남자 주인공이 약혼녀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자기가 지켜줘야 한다는 얘기를 신파조로 흐르지 않게 잘 묘사한 작가의 역량도 좋았다. 일흔을 바라보는 김수현 작가는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멜로드라마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대사 한 줄, 장면 하나 하나가 영화를 보듯이 완성도를 높이려는 그녀의 노력이 돋보인다.

한 기자도 지적했지만 지극히 통속적인 뻔한 내용의 드라마를 섬세한 심리 묘사와 빠른 극 전개로 몰입하게 만든다. 다음의 글을 쓴 이도 지적했듯이 이 드라마가 결국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인 기억과 추억에 대한 단면을 풀어가고 있기 때문에 공감을 얻고 있는 듯 하다. 또한 이 드라마는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망가져 가는) 한 여자의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유럽,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서서히 그 수순을 밟아 가고 있고(큰 변화가 오리라 본다), 아마도 우리는 이 과정의 끝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지도 모르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고 마감할 것인가도 되돌아보게끔 한다. 특히, 사랑이라는 큰 틀 안에서 말이다.

엔터미디어로부터: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억으로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그래서 '천일의 약속'은 그 상투적일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사랑을 표피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삶의 잣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큰 차이다. 삶이 결국 하나의 짧은 기억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기억을 누구와 함께 나누고 누구의 기억으로 채우며 누구의 기억 속에 남게 되는가는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파혼선언을 해버리는 남자 박지형을 이해할 수가 있다. 박지형의 선택은 결혼식이라는 그 짧은 순간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양가 가족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인생 전체를 두고 바라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삶의 기억일 수 있는 여자의 마지막 기억 속에 남고 싶고, 그녀의 마지막을 자신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은 그 삶의 욕망.

'천일의 약속'은 제목처럼 시간(천일)과 기억(약속)에 관한 김수현 작가의 진중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와 함께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시고, 트림을 하며 밀어를 나누던 이서연의 그 일상적인 기억들은 지극히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녀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아련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직업이 책을 만드는 출판이라는 사실은 이 지극히 한 개인의 이야기를 우리네 삶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그 기억을 잡고 싶고 남기고 싶은 욕망. 책이라는 인간의 욕구.

"나는 고장 나고 있어."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이미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아직 멀쩡하지만 '고장 날' 것도 아닌, 현재 '고장 나고' 있는 상황. 이 한 줄의 대사는 우리네 삶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서연은 알츠하이머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기억의 관점에서 이 '고장 나고' 있는 인생을 깨달았던 것뿐이다. 사실 그 누구도 '고장 나고' 있지 않은 인생은 없지 않은가. '천일의 약속'이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 '고장 나고' 있는 우리네 삶의 운명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기억을, 추억을.


http://www.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786&bc=03&mc=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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